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트 3국 점령 (문단 편집) === 점령 === [include(틀:소련의 대외전쟁)] 이때 이후 발트 3국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졌다. 소련은 1939년, [[에스토니아]]를 시작으로 상호간의 군사기지 건설과 상호 원조 조약을 수용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폴란드군#s-4|폴란드 해군]] [[잠수함]]이 에스토니아를 거쳐 영국으로 탈출한 것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에스토니아는 9월 28일, 라트비아는 10월 5일, 리투아니아는 10월 10일에 각각 조약을 체결했다. 결국 발트 3국에는 총합 75,000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940년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발트 3국을 병합할 자세를 보였다. 외무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발트 3국이 소련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에 무제한으로 군대가 주둔할 수 있고, 정부를 교체할 수 있게 해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발트 3국은 이를 수용했다. 리투아니아는 6월 15일에 수용했고, 불과 8시간뒤 6월 16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수용했다. 소련은 3일만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발트 3국을 점령했고 각국의 군대는 무장해제 당한다. 이후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을 설득해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4일과 15일 사이에는 합병에 관한 조작된 투표가 이루어지고 소련은 이를 통해 자발적으로 3국이 소련에 합병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선전했다. 7월 21일에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된다.[* 사실상 소련의 [[괴뢰 국가]]였다.] 이후 [[반공]], [[반소]]적인 인사들은 추방되었다. 추방된 사람은 최소 12만 명 정도라고 한다.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 발트 3국은 소비에트 연방 가입 신청을 했다. 이는 받아들여졌고 리투아니아는 8월 3일, 라트비아는 8월 5일, 에스토니아는 8월 9일 소련에 병합되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을 비난했고, 서방 국가들은 대부분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후 벌어진 독소전쟁으로 인해 소련의 입지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그들의 외교적 입장이 발트 3국의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 이 3국 정부는 모두 1차 대전 직후 성립된 독립국 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이며 소련 구성국 체제는 말하자면 [[괴뢰국|괴뢰 정권]]으로 보고 적법한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독일이 물러가고 소련군이 다시 발트 3국에 들어오자 '숲의 형제들'이라고 불리우는 파르티잔들이 1956년까지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소련에 병합된 이후 소련에서 가장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경제 수준이 좋았지만 인접국인 핀란드나 스웨덴에 비하면 소득 수준이 크게 낮았던 데다가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 현지 문화를 적극적으로 익혔던 것도 아니었고 주요 공직을 독점하는 경우가 많아 박탈감이 심했다. 결국 국내외의 끈질긴 투쟁 끝에 1990년 [[노래 혁명|전격 독립을 선포했고]], 지속된 국력저하 속에 이들의 독립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던 소련 정부는 [[8월 쿠데타]]라는 대자폭을 맞고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 이후로는 발트 3국이 2004년 [[NATO]]에 가입하면서 러시아에 거대한 빅엿을 날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